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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은 어떤 매력이 있는가
1.
“진정한 미(美)는 아슬아슬하게 추(醜)를 희롱한다. 자기 자신에게 모험을 건다.
비율의 수학적 규칙에 편안하게 안주하지 않고 모험에 나서서,
추로 미끄러질 수도 있는 바로 그 세밀한 곳들에서 매력을 발산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구불구불한 선은 직선이 보여줄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 있다. 수학적 비율이 만들어낸 완벽함에는 우리의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지만, 어설퍼 보이는 작품의 빈틈에는 우리의 상상력이 드나들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추(醜)를 희롱하는 작품은 교감의 여지를 갖고 있다.
덧붙여, 지저분한 낙서처럼 보일 수도 있는 선들이 모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을 때 이 둘 사이의 이질감에서 감칠맛이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2.
“동시에 진행하던 두 그림 중 먼저 끝낸 것은 <잡목림 속의 구덩이>였다. 금요일 오후에 완성되었다. 그림이란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절로 독자적인 의지와 관점과 발언력을 획득해간다. 그리고 완성에 다다르면 그리는 사람에게 작업이 종료되었음을 알려준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에게는-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말이지만-어디까지가 작업 중인 상태이고 어디부터가 완성된 상태인지 거의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미완성과 완성을 가르는 하나의 선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리는 본인은 알 수 있다. 이 이상은 손대지 않아도 된다고 작품이 소리내어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기사단장 죽이기 2」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을 하나 끝내는 데에 보통 4시간에서 5시간 정도 걸린다. 처음에는 밑그림 위로 뼈대를 세우고 메스(mass)의 형태를 잡는 등 진행이 확연하게 눈에 띈다. 하지만 명암, 질감, 생동감같이 세부적인 요소에 들어서게 되면 내가 진행의 어디쯤 와 있는지 갈피를 놓칠 수밖에 없다.
그럴 땐 그림을 이리저리 살펴보곤 한다. 멀리서도 보고 밝은 곳에서 보다가 한 부분만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펜을 놓아야 하는 순간임을 직감할 때가 있다. ‘완성되었다’가 아니라 ‘멈춰야 한다.’에 가까운데 대부분은 과함이 그림을 망쳤기 때문이다.
간혹 그 직감을 무시하고 더 그리다 보면 - 가령 「프랑스 노트르담 성당」에서 벽돌의 질감을 살려보기 위해 오랜 갈등 끝에 무늬를 넣었던 것 – 전체적인 균형을 꼭 해치게 된다. 이런 실수는 많이 그리고 교감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망설여지는 순간에 미완성과 완성을 가르는 하나의 선이 무엇인지는 그림이 대답해준다.
3.
“지금까지 연주 중에 틀린 음을 낸 적은 없나요?” 에드몽 웰즈가 묻는다.
“솜씨가 서툴러서 낸 틀린 음은 말 그대로 틀린 음이죠. 하지만 확신을 갖고 낸 틀린 음은…… 즉흥 연주입니다.”
「신 6」 베르나르 베르베르
선을 긋다 실수를 하더라도 자신 있게 하면 그 선은 그림의 일부가 된다. 실수는 없지만 자신 없는 연주보다 실수하더라도 끝까지 자신 있게 연주한 곡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실수는 없지만 자신 없이 그린 그림보다 실수를 여러 번 했더라도 자신 있게 그린 그림이 더 매력 있다. 선 하나에도 자신감이 담기고, 그 선은 사람의 마음을 당긴다.
4.
또 하나의 매력은 백지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를 마주하고 있을 때의 그 막연함은 묘한 공포감 비슷한 것을 품고 있다. 온전히 그림에만 집중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나 의지 없이 시작했다가는 대충 그리다 애정이 식어 아까운 종이만 버리게 될 뿐이다. 금방 지워버릴 밑그림이라도 집중해 그려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힘을 다해 애정 어린 그림 한 편을 얻게 된다.
5.
실사에서 느껴지는 질감을 훌륭하게 표현해낸 작품, 명암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작품, 생동감을 주기 위해 넣은 사람·나무들 같은 조형들이 피사체보다 매력 있게 느껴지는 작품. 온전히 내 손으로부터 만들어진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묘하게 빠져든다. 그림이 움직이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아닌데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음에도 흐뭇하게 하는 그런 힘이 있다. 그래서 힘들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종종 좋아하는 그림을 꺼내어 보기도 한다. 덧붙여, 오래전에 그렸던 그림과 비교하며 바라볼 때 그 성취감은 늘 새롭고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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