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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기(銃器)와 제식(制式)을 얻고 총기(聰氣)와 재기(才器)를 잃다
    생각해 볼 것들 2022. 6. 21. 12:26

     

    : 18개월 군 생활을 회고하며

     

     

    미루고 미뤘던 군 생활 회고록.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기록하지 않고 전역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전체를 회고하며 하나의 글로 완성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러지 말았어야하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군 생활 끝에 오니 많은 기억이 미화된다. 약간의 분노나 뜨거웠던 감정은 온기조차 느끼기 힘들 정도의 불씨로만 남아있어 내가 써나가는 게 정말 나의 군 생활이었을까 하는 의심이 여러 번 들었고, 몇 번을 통째로 지웠나 센 지는 오래다. 이제는 내용이 어떻든 미루지 말고 싱싱하긴커녕 상하기 직전의 몇 안 되는 기억이라도 붙잡고 써보기로 한다. 더 미뤘다가는 군대가 제법 지낼 만한 곳이라는 허튼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군 생활을 책으로 쓰면 성경 5권 분량은 더 쓸 수 있다던 모 성도님의 말에 공감이 된다. 그 정도로 다사다난했지만 웬만하면 밖에서는 군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표제만 ‘군대’로 같을 뿐 그 내용물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만난 좋은 인연을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다는 사람들, 논산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는 사람들 등등. 나는 아마도 후자인 것 같다. 그 이야기를 모두 다루기는 어려울뿐더러 지저분할 것만 같아 간소하게 몇 가지 이야기만 꼽아보았다.

     


     

    1. 총기(銃器)와 제식(制式)을 얻고 총기(聰氣)와 재기(才器)를 잃다.


    총기를 처음 받던 날이 아직도 제법 생생히 기억난다. 서늘한 온도와 투박하게 균형 잡힌 무게. 총알이 없어도 총구를 사람에게 지향하지 말라는 조교들의 말이 설명 없이 이해가 가는 물건이었다.

    비장함은 잠깐뿐이었고,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군 생활을 했다. 총기보다 삽을 더 많이 만졌고, 훈련받는 시간보다 창고 정리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보통 군 생활이 어떻냐 물어보면 ‘입력과 출력’이라고 대답한다. 말에 토다는걸 별로 싫어할뿐더러, 수십 년 비슷한 생활을 해온 그들이 고수해온 방법을 조정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의문이 떠오를 때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라고 둘러대며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행동으로 옮기는 게 서로가 편한 곳이다. 내가 고참이 될 즈음에는 생각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었다.

    생각하지 않는 게 몸에 베어가며 느낀 모종의 두려움이 자기개발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입대 전 자기개발을 위해 여러 목표를 세웠지만 유일한 지성의 끈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고 동시에 군대에 희석되어 희미해지는 정체성을 지켜보며 더는 순순히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점철되어 또 다른 성격의 의지로 작용했다.

    아흔네 권의 독서, 어반스케치(Urban sketch), 수십 편의 교양 수업들. 덕분에 밖에서는 해낼 수 없을법한 것들을 군대에서 제법 이뤄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쁜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어쩔 수 없는 무료함’이나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유의 결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허기를 느껴야 원하고 구하게 되는 법임을 배웠다.

    결국, 잃었던 총기(聰氣)와 재기(才器)를 더 훌륭한 것으로 돌려받았다. 그러나 이건 군대가 내게 준 선물이 아니라 온전히 나 혼자만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산불


    울진에 산불이 났다고 했다. 진화하기 위해 동이 틀 때 출동하고 일몰하기 전에 복귀하기를 반복했지만 그러한 바람이 무색하게도 며칠 뒤 10년 만에 가장 큰 산불이라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언론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울진 말고도 서너 군데에 산불이 동시에 났었다. 산불은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일어났다.

    항공부대 특성상 산불이 나면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만큼 인력을 많이 소모하게 되는데 그러면 부대 전체가 긴장된 상태에 돌입한다. 둘이서 하던 일을 혼자서 하게 되고, 근무는 두 배가 되며, 잠과 쉴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정말 군인이 된 것 같다는 걸 실감했던 때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4시간만 자고 장거리 배차를 나가야 했고, 근무 때문에 밤에 두 번씩 깨는 일도 다반사였다. 상황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되자 모두가 극한으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건 안중에 들어올 겨를도 없었고 당장 내가 얼마나 잘 수 있고 근무에 얼마나 투입되는지가 중요했다. 원초적인 욕구와 판단에만 의존했었다.

    스스로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원초적인 충동과 극도의 예민함으로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내가 낯설었고 부정하고 싶었다. 원래 내게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었을까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걸까. 마음 같아서는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며 외부에 책임을 묻고 싶지만, 그 상황 속에 있던 모두가 같은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론한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점잖음을 지키던 소수의 사람이 있었다. 낯선 내 모습을 받아들일 때 즈음 산불은 모두 진화되었다.

    수천 명의 용사와 수백 대의 차량, 수십 대의 항공기 등 군에서 천문학적인 자원이 산불 진화를 위해 투입되었다. 아울러 상황실의 수뇌부의 불 역시 꺼지는 날이 없었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군의 노력이 언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입된 백신이 전국으로 수송될 때 군에서 각고의 노력의 기울였지만, 이 사실이 수면 위로 떠 오르지 못했다. 군대를 미워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군인들에게 새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안온한 삶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항공기는 특수 가공된 유류를 사용한다. 그리고 한 번 이륙해서 수 시간 비행하게 되면 수백만 원을 웃도는 유류를 소모하게 된다. 울진 산불 때 산림청을 포함해 60대 언저리의 항공기가 동이 틀 때 출동해 해가 질 때 복귀하기를 며칠이나 반복했었고, 기름값만 해도 수백억 원이 들었으리라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다. 항공기 기름값만의 이야기고 지원된 인원들의 식사, 차량, 항공기 정비 등등 지속지원에 사용된 금액은 가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과 사회를 지키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인적·물적 자원이 필요함을 피부로 느꼈다.

     

     

    3. 버거교 | burger 敎


    군에 들어오기 전 ‘너 교회 다니던 사람이었어?’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 다니던 사람이었구나, 그럴 것 같더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겸손과 친절, 따뜻함이 성도의 필수 자질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성도는 되지 말아야 함을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얼마 오래 가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을 챙길 여유조차 부족했고 어차피 오래 볼 사람들도 아니겠거니 앞뒤 가릴 것 없이 행동했다.

    1분대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이가 2살 많은 후임이 있었다. 이름은 태어날 때 지음 받는 것이기에 무관한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병장을 달아서도 친절과 겸손을 잃지 않았다. 울진에 산불이 났을 때에도 점잖음을 지켰던 유일한 위인이었다. 내가 본 마지막 순간까지도 처음 그 모습을 지켰다.

    영내에도 교회가 있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다. 나도 한두 번 나갔지만 지루함을 못 이겨, 그리고 지적·영적인 활동을 할 만한 육체적·정신적 여유가 없어 나와 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그만두었다.

    군대에서는 주말에 교회에 가면 영내에서는 먹기 힘든 음식들을 준다. 내가 있던 부대의 경우는 햄버거를 줬는데 요한은 햄버거로 분대 선임들과 후임들을 꼬드겼고 결국에는 5명이나 주일 예배에 데리고 갔다. 그네들은 ‘버거교’라며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했다.

    같은 환경에 있었지만, 요한과 나는 달랐다. 여러모로 그가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겸손과 친절 따위는 내려놓아야 편한 곳에서 끝까지 지킬 수 있었음은 성향인가 싶은 생각도 많이 했지만, 신앙적인 부분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강력하다기보다 뿌리깊은 신앙심이 궁금해서 여러 번 말을 섞어 보기도 했지만, 신앙심에 취해 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각자의 군 생활이 있듯, 각자의 신앙생활이 있다. 그이가 그렇게 될 수 있었음은 그만의 사연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설령 내가 그 비결을 들었다 하더라도, 똑같이 따라 하더라도 그와 같아질 수 있었을까. 그저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명확한 가치관과 꺾이지 않는 신앙심을 존경하고, 기억하며 닮아가야겠다는 배움이 있었다.

     

     

    4. 멘시키의 구덩이

     

    "지난번 이 어두운 구덩이에 한 시간 동안 혼자 있으면서도 그때를 떠올리셨나요?"

    "그렇습니다. 때때로 그렇게 원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어요. 지금의 저를 만든 장소로.

    사람이란 편한 환경에 곧바로 익숙해져 버리니까요."​

    「기사단장 죽이기2」 무라카미 하루키

     

     

    사회로 돌아가면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기로 매일 다짐했었다. 억압된 생활 속에서 자유를 갈망했고, 그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허투루 쓴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사회로 돌아왔지만 수십 개월 동안 되뇌었던 다짐은 며칠 가지 못하고 원망스러웠던 모습으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위기감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안온한 환경에 게을러지는 건 당연하다며 스스로를 두둔하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멘시키 와타루에게 구덩이가 형무소 생활을 떠올리게 해 주었듯, 이 글이 과거 자유를 갈망하며 시간을 의미 있게 쓰겠다는 약속과 열정을 환기시켜주는 구덩이의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군 생활 금방이라는 말이, 듣는 사람들에게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닌 것 같다. 머리털이 다 빠질 것같이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만큼 배울 수 있었다. 깨달은 바가 많아서 과장 반 섞어서 만약에 1년 늦게 입대했더라면 그 늦게 간 1년은 내다 버린 시간이라는 이야기도 종종 하고는 한다.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고,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자주 질문하며 삶을 진지하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워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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