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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서평 2022. 9. 27. 21:53
인간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의 존재는 동전의 양면보다 가까워 결국 공존한다는 한 줄 평가를 남기고 싶다.
인간과 그 역사는 무거울 수만은 없는, 다시 말해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설을 접하기 전에는 이 책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몇 해설을 접한 뒤에 나는 이 책이 철학, 인간의 존재, 역사(역사적 사실 따위를 넘어서 그 시간 속에서 사람들의 작용과 그에 대한 의미들), 사랑 등에 대해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책을 전부 읽기 전에 해설을 먼저 접하는 것을 어쩌면 내 시야를 해설에서 제시한 몇 가지 대상에 국한시켜 나의 시각이 아닌 오롯이 해설자의 시각으로 책을 읽게 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처럼 갈피조차 쉽게 잡을 수 없는 책에 대해서는 그나마 몇 가지 대상만이라도 찾아볼 수 있도록 해주기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이 책이 품고 있는 대상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깊이 또한 깊어서 13번 넘게 읽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렇듯 참 어려운 책이었다. 눈으로는 전부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해 글자를 그림처럼 눈으로 따라가기만 한 부분이 아마 2할은 넘지 않을까 짐작 될 정도다. 한 번 읽어 부족한 책(book)임을 확신하지만 첫 번재 독서에 소감을 남긴다.
사랑에 대해서,
이 책이 가진 여러 대상 중 온전히 내 힘만으로 찾을 수 있었던 몇 안되는 대상 중 하나이다. 토마시와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라는 인물 관계 속에 사랑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도 있고 철학적인 책이 설마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다루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졌고 때문에 이 책 속에 담긴 사랑에 대해서 통찰하려고 하지 않았다.
몇 해설을 접하고, 결국 책을 덮고 난 후에 이 책이 사랑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다루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내가 남녀간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그러한 생각을 가짐은 성적인 흥분과 쾌락을 추한 것 혹은 부끄러운 것과 같이 여기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에 대해 ‘사랑’이라는 단어는 추상적인 사랑을 담어내기에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테레자처럼 사랑 속에 섹스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반면-나 또한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나아가 흥분과 쾌락의 정점인 섹스를 포함한 사랑(남녀간의)은 인간의 존재와 철학과 같은 대상들에 비해 고귀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토마시와 같이 사랑과 섹스(육체적 쾌락과 흥분)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독서를 통해 내가 이성간의 사랑을 가벼히 여기고 있음과 그러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덧붙여서 책에서 사랑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제시하는데-내가 책으로부터 많은 인용구를 옳겨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그것들 모두 원래 없었는데 창조된 것이 아닌(사실 이 말이 더 헷갈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데) 기존의 사랑이 가지고 있던 의미들을 문자로 풀어 설명한 것임을 책을 읽고 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찰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생각 해보게 되었다(통찰은 인생의 시야를 무한히 넒혀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라엥 대해 종이 한 장 분량만큼도 쓸 수 없던 나와 달리 사랑에 대해 통찰한 밀란 쿤데라는 500장 가까이 되는 분량으로 풀어 표현했음이 이를 대변한다).
존재에 대해서,
사실 인간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이지만, 대부분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전성기에는 신처럼 여겨졌지만 결국 변소 문제로 자살한 스탈린의 아들 이야기로 저자는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처럼 여겨짐과 동시에 똥을 쌀 수밖에 없는 스탈린의 아들을 통해서 결국 무거운과 가벼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끗 차이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신격화와 배변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존재를 바라보며, 어쩌면 지수함수의 무한을 0으로 수렴함으로 여김과 같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동전의 두께보다도 하염없이 가까운 것이라 이 둘은 공존하고 있음을 즉 인간은 무겁기만 할 수 없는, 가벼울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생각해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토마시와 테레사의 삶을 통해 나는 존재의 가벼움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젊고 힘이 넘치는-육체적 힘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의지대로 영위할 수 있던-테레사와 토마시는 시간이 갈수록 늙어가고, 힘을 잃어가며 자신들의 의지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의지대로 영위할 수 있을 때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작용-정치적, 사회적-들에 비해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킨 노후의 삶 속에서의 작용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이렇듯 자신의 삶에서조차 힘을 잃고 작용 또한 없는 인간에게서 나는 가벼움을 느꼈다.
아울러 이렇게 힘을 잃고 작용을 피하는 증상의 원인은 단순히 노화가 아니다. 우리가 심적으로 약해졌을 때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언제든 그러한 상황·태세를 취하고는 한다.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은 언제든 가벼워 질 수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한편 인간에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과, 고귀해 보이는 정치, 사회, 역사적 작용(이것들은 개인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다수의 인간들과의 작용인다)이 무거움의 잣대가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남기게 된다.
역사와 키치에 대해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역사 또한 가볍다. <6부-대장정>에서 보았듯 위대하고 고귀해 보이는 ‘역사’라는 성(castle)은 어쩌면 수없이 많은 키치라는 벽돌이 쌓여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종의 역사가 위선의 집합이라는 가벼움을 부정하고자 후손들이 그럴싸한 포장을 한 것이다.
--2부 영혼과 육체--
: 영혼과 육체간 이원성어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 육체와 영혼을 구분해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 할 뿐 구체적 관점을 제시받지는 못했다. 이에 육체는 영혼에 대해서 ‘낯선 장치’라고 표현된다. 기술 발전 이전에는 심장 박동 소리만으로도-그 박동이 무엇인지 모를 때-두려움과 육체에 대한 낯설음을 가질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체내 각각의 장치와 역할을 알고 난 오늘날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낯설음)을 느낄 때가 있다.
65p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 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근래에 젊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내가 원하는 젊음의 대상은 육체였을까 영혼이었을까? 둘 다였을까?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할까?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한다면,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육체는 그저 기계장치와도 같을 뿐일까? 아니라면 육체와 영혼은 조화를 이루며 이원적 존재임을 다시 부정하는 것인가? 새로운 관점은 많은 질문을 제시한다.
육체는 영혼과 아예 분리되지 않는다. 단순히 호르몬과 기분의 관계가 될 수 있고. 육체적 결합으로 아이가 생겨 책임감, 가정 등으로 인과가 발생할 수 있다.
80p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나타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81p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쳐져야만 한다.
324p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91p
독학자와 학교에 다닌 사람의 다른 점은 지식 폭이 아니라 생명력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 차이다(책에서는 독학자의 생명력과 신뢰감이 더 크다고 말하고 있다)
98p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말 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를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126p
그것은 현기증이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극복할 수 없는 추락 욕구
…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 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딱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142p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산모자를 거쳤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대상이 매번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켰다. 새로운 체험은 보다 풍부한 화음으로 공명을 일으켰다.
중산모자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나는 성경을 지목했다-내가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교리에 어긋나고 모독하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성경이라는 강바닥에 발을 딛고 서서 나는 매번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찾는다. 그로부터 발견한 수많은 의미들은 서로 화음을 이루고 공명을 발생시켜 내 삶과 (종교에 대한)믿음을 더욱 굳세게 결속시킨다.
성경과 사비나의 중산모와의 차이가 있다면 중산모는 사비나만의 강바닥인 셈이다. 프란츠에게도 프란츠만의 강바닥이 있으리라. 물론 그 매개체가 사비나의 중산모라 할지라도 각자 그로부터 도출된 의미는 다르다. 하지만 성경은 공유하는 강바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43p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브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시바나가 중산모자의 모티브를 서로 나누어 가졌듯)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조그만 어휘집
프란츠는 정조를 사비나를 사로잡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매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조를 중요시했던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은 그녀에게 정조는 억압의 근원이었으며 때문에 배신을 더욱 사랑했다.
프란츠에게 음악이란 문장의 부정, 반언어 그 자체로 예술의 정수였지만 사비나에게는 소음과도 같은 존재였다.
반에서 일 등을 하다가 마침내 학교를 빼기로 한 결심에 쾌적한 짜릿함을 느낀 프란츠에게 거짓말은 일탈이었다. 거짓말하고 본심을 감추는 것이 재미있던 것은 그런 짓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비나에게 진리속에서 산다거나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192p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배신”이라는 단어 때문에 마치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일수도-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비나와 공통점·동질감이 느껴진다. 과거를 잊고 진보만을 위한다는 내 신념을 핑계로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내 인생으로부터 끊어버렸다, 배신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주위에 나를 과거와 연결시켜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배신”이 반복되고, 확장되어 과거를 연결 해주던 모두(가족, 친구 등)를 잃게 되면 나는 가벼운 존재가 되는 것인가? 너무 일차원적인 정의이자 생각일까. 책에서 전하고 있는 “참을 수 없느 존재의 가벼움”이란 무엇일까?
210p
집단수용소, 그것은 밤낮으로 뒤엉켜 사는 세계였다. 잔인성과 폭력은 이 세계의 부수적(전혀 필연적이지 않은)측면에 불과했다. 집단수용소, 그것은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이었다.
214p
더 이상 테레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체 각 부위가 커지거나 작아진다면 그래도 여전히 자기 자신일까? 여전히 하나의 테레자로 남을 수 있을까?
당연하다. 테레자가 테레자를 전혀 닮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그녀의 영혼은 언제나 변함없을 것이며 그녀 육체에 일어난 일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렇다면 테레자와 그녀 육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녀의 육체는 테레자라는 이름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육체에 이런 권리가 없다면, 그 이름은 무엇과 관계되는 것일까? 오로지 비육체적이며 비물질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242p
영혼을 흥분시키는 것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행동하는 육체에 배신당하는 것, 그리고 그 배신을 목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부-이해받지 못한 말들--
259~261p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온 나라는 익명으로 변했다. 그 결과 소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거리 표시판과 도로 안내 표시까지 뽑아버린 도시에서 소련군은 신문사, 방송국 등 그들이 점령하고 바꾸고자 한 대상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거리의 집 어느 하나 원래 이름을 되찾지 못했다. 모든 이름들이 러시아와 러시아 역사에서 따온 것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자아·정체성을 잃었고 결국 본인이 위협 그 자체의 일부가 되었다.
302p
- 베토벤의 그 유명한 muss es sein? muss es sein! 이라는 테마에 얽힌 진짜 이야기.
- 농담을 형이상학적진리로 환골탈태 시킨 것
-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의 전이
308p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344p
- 토마시가 자신을 비롯한 정치범들 석방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전에 경찰이 찾아왔을 때와(의사로 있을 적) 이번에 창문을 닦고자 방문한 집에서 그의 아들과 기자를 만난 것에 대한 공통점은, 두 부류 모두 토마시가 쓰지 않은 글에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고 차이점은 서로 극단의 정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토마시는 둘 다에게 서명을 하지 않고 일상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무거운 것’이란 역사속 자아이고 ‘가벼운 것’이란 개인의 삶이라 보아도 되는 것일까?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346p
-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
376p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 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모든 존재는 사실 가볍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벼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가벼운 존재라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한다.
신(스탈린이 신처럼 추앙되었기에)의 아들로 여겨졌던 스탈린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아야 하는 가벼운 존재로 여겨졌을 때 그는 삶을 포기했다. 그의 죽음은 비참한 처지에 굴복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398p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6부 대장정--
419~420p
키치 그 자체로 이루어진 행진의 끝에서 그는(프린츠) 그들의 대장정이 키치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코믹한 허영심과 유럽 역사의 장대한 소란이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부정하고자 요란한 총성 속에서의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꼈다.
프란츠의 이러한 돌연한 욕망에 우리는 뭔가 떠오른다. 그렇다, 인간 존재의 극과 극이 거의 닳을 정도로 서로 가까워져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천사와 파리, 신과 똥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점이 없게 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며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달려가 매달린 스탈린의 아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가, 인류의 역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임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이해(저자로부터)되고 있다.
인류의 장황한 역사(거대한 전쟁을 비롯해)가 어쩌면 프란츠의 대규모 행진처럼 고귀한 명분으로 포장된 수없이 많은 키치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421p
- 사람들이 살아갈 때 어떤 시선을 받고 싶어하는지 네 범주로 나누어 설명했다.
나는 네 번째(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의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약간의 첫 번째(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성향·범주는 다수의 친한 사람들이 시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 대중을 잃으면 인생의 무대에 불이 꺼졌다고 상상한다.
세 번재 성향·범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흑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7부 카레닌의 미소--
448p
- 첫 번재 문단 : 동물에 대한 데카르트의 생각
450p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나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461p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낫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적어도 여러 형태 중에서 최상의 경우라도)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 역사의 이러한 기형태는 아마도 조물주가 계획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다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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