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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서평 2022. 10. 1. 23:22
친구여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 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물론 자네가 단지 자기 자신, 그리고 더 나은 자신과 함께 살고 싶다면,
자네에게는 그 어떤 충고도 필요 없겠지만
읽게 된 이유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서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고서 즉시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추가했다(약간의 모멸감을 느끼며,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베니스의 상인』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기분, 문학에 대한 무관심이자 무지함을 방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작용했던 것 같다.
예술동화 『피터 슐레밀』
149p
이야기 전체는 낭만주의가 추구했던 인위적으로 창작된 예술동화일 수 있지만 그러한 동화적 분위기를 뛰어넘어 그림자, 그림자의 상실, 사회적 반응과 개인의 고통 등 ‘돈’이 지배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사회 현실의 상황(당시와 현재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 등)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된다.
그림자와 돈의 잘못된 교환
153p
그림자를 잃은 그는 사회적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는 고통스럽고 서러운 상황을 경험하게 되고, 특히 사랑하는 미나와의 결혼이 좌절되면서 처절한 아픔에 사로잡힌다.
158p
부와 명예를 얻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기본 조건인 그림자를 팔아넘기고 살아가는 삶이 결국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 자연으로 복귀하는 이야기인데, 여러 측면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건드리고 있다. 작품이 출간된 19세기 초엽은 정치 사회적으로 이미 자본주의 사회가 태동한 시기이며, 경제심리학적으로는 부를 맹목적으로 절대시하는 황금만능주의의 심리가 싹트던 시기이다. 『피터 슐레밀』은 일차적으로 그와 같은 ‘자본으로서의 돈’, ‘돈에 의한 교환’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사회 현실에 대하여 날카롭고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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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교환이란 비슷한 가치를 지닌 사물을 맞바꾸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슐레밀은 정당한 교환 행위를 실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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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경제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인간학적 가치에 대한 기표인 것이다. 상호 대등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교환될 때 정상적인 거래가 성립되기 마련인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림자와 마술 주머니는 비정상적인 교환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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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그림자의 가치에 대한 인식 결핍의 상태에서 슐레밀이 교환 행위에 뛰어든 까닭은 “계급 사회 내에서 탈인간화를 낳게 되는 돈의 영향” 때문이다. 즉, 슐레밀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돈에 지배된 상태였고 그로 인해 그림자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면서 거래에 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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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절대원칙 내지는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경제적 근본주의에 맹목적으로 복종되어 있는 이들은 아마도 슐레밀처럼 자신의 모든 것(양심, 그림자, 영혼 등)을 기꺼이 팔아넘기려는 충동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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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와 돈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니기에 상호 교환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돈(마술 주머니) 때문에 그림자를 팔아넘긴 슐레밀의 행위는 돈을 무시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녹록치 않은 동시대(혹은 현재)의 사회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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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돈이 지배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인아 부재하다는 인식이 1830년대 작가들의 사회적 딜레마였다고 할 수 있다.
165p
『피터 슐레밀』에서 돈은 무조건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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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 벤델과 미나가 슐레밀이 남기고 간 돈으로 병원을 운영하는 것을 보건대)돈을 정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의미있는 사용’이 중시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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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슐레밀』은 단순히 그림자 상실을 애처롭게 읊는 “마음의 운문”이 아니라 돈의 지배력과 영향력 등에 의해 엮어지는 “관계의 산문”에 대해 독자로 하여금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작품이다
덧붙여서 “황금 만능주의”가 오늘날 미치는 영향을 더 깊게 알게 되었다. ‘돈’은 ‘교환’의 개념에서 비롯되고 창조되었다. 앞서 말했듯 교환이란 본디 등가성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인데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해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에 대해서 초월적 가치를 부여해 ‘등가성’의 개념을 상실시켰다. 다시말해 결코 교환할 수 없는, 동등할 수 없는 것을 동등하다고 판단하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실제로 우리는 돈을 받고 양심, 인간성, 도덕을 잃고는 한다. 교환이라는 돈의 창조점을 환기하며 오늘날 돈이 가지는 의미, 황금 만능쥐의의 실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림자, 견고한 것
171p
그람자는 인간이 특정 지역에서 태어나는 순간 자연적으로 혹은 사회문화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보편적인 것’을 뜻하며 그림자의 상실은 그런 ‘보편적인 것’의 상실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칼 베르텔(K.Bartel)이 다음과 같이 오래전에 분석한 바 있다.
「그림자는자연적 필연성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것이다. 여러 가지 삶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데 우리는 신적인 질서와 숙명적인 섭리에 의해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게 된다. 거기서는 혈족, 몸의 형태, 조국, 신앙, 가족, 계층 같은 것이 주어진다. 이것을 많은 이들은 성가시게 혹은 무관심하게 여기는데, 슐레밀이 자신의 그림자를 그렇게 여겼듯이 말이다.」
174p
『페터 슐레밀』에서 그림자는 모든 시민적 연대성과 인간적 소속성의 상징이 되고 있다.
175p
그림자를 팔아버림으로서 슐레밀은 타인과의 유대 관계를 상실함으로서 내적, 외적 고통을 겪게 되며, 그런 점에서 그림자의 가치가 새삼 중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172p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혈족, 몸과 피부색, 조국, 신앙, 가족, 계층 등)을 과도하게 강조할 경우, 이는 자칫 민족주의 내지는 인종차별주의를 신봉하는 파시즘적 이데올로기와 연결될 수 있다. 가령 특정 개인이 민족적 종교적 특성을 지니지 않을 경우 그는 ‘우리와 동일하지 않다’(보편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배척될 수 있으며…
그림자를 통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보편적인 것들과 그것들의 역할-시민적 연대성과 인간적 소속성-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엇다.
나아가 끝에 언급된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림자에 대한 지나친 가치 부여는 민족주의 내지는 인종차별주의라는 문제를 불러올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며,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그림자는 무엇이며(소속감과 연대감의 증명서) 문득 생각하기를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가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을 강조하고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게되면 직접적으로 민족주의·인종차별주의라 불리지는 않지만 그에 버금가는 중대한 사회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물리적인 모임이 사라져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공동체의 소속감과 연대감을 갈망한다.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후천적 그림자”가 필요한 시기이다.
사회적 인간과 자연적 개인의 아이러니
138p
친구여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 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물론 자네가 단지 자기 자신, 그리고 더 나은 자신과 함께 살고 싶다면, 자네에게는 그 어떤 충고도 필요 없겠지만.
180p
“더 나은 자기 자신과 함께 살고 싶다면, 자네에게는 그 어떤 충고가 필요 없겠지만”라는 구절은 보편적인 것을 중시하라는 교훈적 충고를 뒤집는 일종의 자기 성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아이러니와도 같다. 역으로 말하면 “더 나은 자기 자신”과 함께 홀로 지내는 고독한 자연 과학자로서의 슐레밀의 모습은 나름 의미가 있으며, 이 경우 ‘보편적이고 견고한 것’은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특히 슐레밀이 자신의 그림자만을 팔았을 뿐 영혼을 팔지 않았다는 점은, 사회적 공동체의 보편성을 결여한 사회적 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체성만을 간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작품 전체는 ‘사회적 보편성과 개인의 특수성’간의 대립 관계에 있으며, 특히 후자도 존재론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결국 이 작품은 그림자(보편적이고 견고한 것)의 상실을 단순히 경고하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측면만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 인간’과 ‘자연적(혹은 낭만적)개인’간의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샤미소는 “견고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적이라기보다 견고한 것의 결여로 인해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사회적 배제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 해보라는 환기로 읽힌다.
또한 위 인용 구절들을 통해 ‘사회적 보편성’과 ‘개인의 특수성’간의 대립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본래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프랑스의 그림자를 가졌지만)태생적 소속감을 내려놓고 독일로 가서 자신이(개인이)원하는 삶을 꾸러나간 그 삶 자체와 “더 나은 자기 자신과 함께 살고 싶다면, 자네에게는 그 어떤 충고도 필요 없겠지만”이라는 마지막 인용 구절이 함께 어우러져 ‘개인의 특수성’에 큰 힘을 실어준다.
26p저는 운 좋게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당신 옆에서 거닐 수 있었는데, 저는 몇 번씩이나-감히 이런 말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정말 형용키 어려운 감탄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자를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 스스로는 그 점을 알고 계시지 못하겠지만, 빛나는 태양 아래서 당신은 고상하고 당당한 마음으로 아주 멋진 그림자를 자신 발밑에 드리우고 계십니다. 제가 주제넘은 추측을 했다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혹시 저에게 당신의 그림자를 넘겨주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33p
이 세상에서 업적과 덕성보다 돈이 훨씬 중요할 지라도 실은 그림자야말로 그런 돈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43p
쇠사슬로 단단히 묶여 있는 이에게 날개가 있다면 소용이 있을까? 아마도 그는 더욱 끔찍스럽게 자포자기할 것이리라.
79p
질문을 드려도 좋다면, 도대체 당신의 영혼이란 어떤 물건입니까? 그것을 본 적이나 있습니까? 언젠가 죽을 때 그 영혼을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할 작정이십니까? 오히려 저 같은 수집가를 만난 것에 대해 기뻐하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x라는 덩어리, 즉 전기가 흐르고 양극 전자장을 지닌 몸덩어리-그 외에 이 쓸모없는 덩어리는 무엇이겠습니까?-가 남긴 유산(영혼)에 대해 실제적인 것, 즉 당신의 생기 있는 그림자로 그 대가를 지불하려는 것입니다. 이 그림자를 갖게되면 당신은 애인의 손을 잡게 될 것이고 모든 소원을 성취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 불쌍한 젊은 처녀를 비열한 불량배 녀석에게 넘기시겠습니까?
영혼을 부정하는 반형이상학적, 반기독교적, 유물론적 언어와 사유로 점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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