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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유럽여행] 로마 여행 | 바티칸 투어와 미켈란젤로일상 2023. 2. 7. 15:26
- 로마,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
0. 바티칸 투어
어제 늦게까지 먼 길을 달려오느라 몸이 피곤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바티칸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허둥지둥 일어나 어제 장을 봐둔 것들로 간단히 요기를 해결한 후 길을 나섰다. 로마는 지하철도 단 두 라인으로(테르미니 역에서 두 역이 단 한 번 교차한다. 유일한 환승지) 교통이 매우 단순해서 늦지 않고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집합 장소에는 막 대학교를 졸업한 듯 보이는 여성 가이드분이 계셨다.
6도에서 15도를 왔다 갔다 한다길래, 영하 8도를 밑돌던 독일을 떠올리며 따뜻하겠거니 싶어 가볍게 입고 나갔는데 큰 실수였다. 바티칸에 입장하기까지 거의 40분 정도를 밖에서 서 있어야 했고 게다가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왔던지라 덜덜 떨며 상당히 고된 시간을 보냈다.
아주 옛날에 바티칸 입구로 쓰였던 곳. 이 앞에서 벌벌 떨며 기다렸다. 그래도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었으면 그냥 중고등학교 때 듣던 수업처럼 무미건조하게 지나갔을 것 같은데 여행을 출발하기 전 한참 공부를 했던 것도 있고, <방구석 미술관>을 비롯해 예술에 대한 책을 적지 않게 읽었던 것들 때문인지 제법 아는 것들이 많이 나와 더 집중하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공부에서 가장 큰 재미를 느끼는 순간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실들과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단단히 관계를 맺게 될 때인데, 가이드님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더해지는 그 순간들이 너무 즐거웠다.
가령 르네상스 전 중세 암흑기의 그림들이 평면적이고 표정과 생기가 없음을 눈으로 확인하거나, 르네상스 이후 소실점 개념이 생기면서 입체감 있는 그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걸 볼 때 등 힘을 들이지 않아도 미술관에 집중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티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손가락에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도 똑같이 바티칸에 방문했고 여기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감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장화>중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을 보게 되면, 신은 아담에게 극적으로 다가와서 숨결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는 반면 아담의 손가락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생명을 주는 것은 신이 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도 필요하다는 상당히 르네상스적인 표현으로 이목을 받게 된 작품이라고 한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스필버그는 이티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알쓸신잡에서 르네상스가 주는 큰 교훈은 진짜 혁신과 예술은 미래나 수십 년 전의 과거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수백 년 전 고대로부터 온다는 말을 했었는데, 스필버그의 사례를 들으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중세 암흑기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고대의 예술을 가져왔기 때문이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스필버그도 르네상스로부터 영감을 얻어 역사에 남는 작품을 만들었다.
2. 숨어 지낸 미켈란젤로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설계했던 미켈란젤로의 성당 지하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는 많은 추측이 오갔지만 정확히 밝혀내지는 못했는데,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던 그가 메디치가가 다른 세력에 의해 잠시 밀려났을 때 다른 세력을 위해 일을 했던 것이 두려워 숨어 지냈다는 것이 유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메디치 가문을 피해 메디치 가문의 성당에 숨어 지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오늘 가이드에서 들었던 이야기로 추측해 볼 수 있었는데, 미켈란젤로의 벽화인 '최후의 심판'은 그 자체로 그 당시 세력가들에 대한 상당히 공격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가령 유력한 세력의 수장 얼굴을 악마 얼굴로 넣는다던지, 흑인이 구원받는 모습이라던지, 악마의 책이 성경보다 두껍고 크게 그려졌다던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당시 세력들은 60대 언저리인 미켈란젤로를 실제로 죽이려 할 정도로 괴롭혔고 수십 년 동안 발을 제대로 뻗고 잔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의 추측이건데 이런 환경 속에서 매디치가의 성당 아래 숨어 지냈던 게 아닌가 싶다. 메디치가는 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숨겨주었던 것으로 보는 게 더 맞아떨어진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3. 노력형 천재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노력형 천재라는 가이드분의 설명이 있었다. 그에게는 스펀지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유용한 스킬들을 금방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작품을 만들게 되면 200장 이상의 스케치 후에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터넷에 그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초상화가 등장하는 그림이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테네 학당>은 무려 600회의 스케치가 있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감히 넘볼 수 없는 업적들과 재능을 가진 천재들과 달리 이런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노력과 집중을 보였던 그의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구석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라파엘로가 있는데 우리가 흔이 할고 있는 초상화의 모습이다. 4. 목이 너무 아파도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천장화
군대에서 한 선임이 있었다. 여러 부분에서 닮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분과 함께 근무를 서며 이탈리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대화를 나눴다기보다 이야기를 들었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표현이 하나 있었다. 천장에 그린 그림이 아름다운 나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그림을 보기 위해 계속 고개를 들고 있느라 목이 아픈데도 고개를 내릴 수 없었다는 그 표현이 뇌리에 박혔다.
이번 여행 중에 이탈리아아에서 경험해보고 싶은 것들 중 하나였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목이 아픈데도 고개를 내리지 못했을까. 글을 적는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지내며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천장을 떠나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그런 경험을.
바티칸에서 방 하나하나를 지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그림은 점점 빼곡해졌다. 어떤 방은 눈이 부실 정도로 금빛이 맴돌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황금으로 마감을 한 곳들도 많았다(복원을 하며 금빛 무언가로 칠한 것일 수도 있지만 과거에는 진짜 금이었겠지). 그리고 5시간이 넘는 투어 끝에 비로소 시스티나소 성당 내부의 천장화를 만나게 되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인간이 손수 만들어 낼 수 있는 정교한 화려함의 극치를 보게된다. 입구에서 가이드분이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줬는데,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장화를 처음 본 사람들이 천장에서 사람이 떨어져 나올 줄 알고 기겁했다는 이야기와 그림이 아니라 천장을 조각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얼마나 대단하면 그런 표현이 쓰였을까 싶었는데 표현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성당 내부에 들어섰을 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은 사진보다 사실 같았고, 정교했고, 생동감 넘쳤다.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이드분이 말씀해 주신 그대로 그림이 아니라 천장에 돌을 조각한 것 같았고 그래서 위에서 아래로 당장 떨어져도 이상할게 하나 없을 것 같았다. 그게 그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부 모서리 등은 튀어나온 돌기둥에 무늬를 조각으로 넣었는데 그 기둥에서 멀어질수록 조각이 아니라 그림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가이드가 말해주기 전까지 몰랐었다. 그러니까 하단부는 돌을 조각해서 무늬를 넣은 것인데, 멀어질수록 명도와 그림자 등을 손수 이차원 평면에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백번 말로 해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천지창조 그림을 인터넷에서 몇 번이고 봤지만 현장에서 본 그림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예컨대 고흐의 초상화를 인터넷으로 보고 미술관에 방문해서 1평 안 되는 그림을 눈으로 봤을 때 그 차이를 사실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는 방 하나가 통째로 작품이었다.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문자 그대로, 미켈란젤로는 천장과 벽에 붓으로 조각을 했다. 그림을 걷어내면 식빵만큼이나 단조롭고 평면적인 둥근 방인데 미켈란젤로의 붓 만으로 현실을 초월한 공간이 되었다고나 할 수 있을까. 정말인지 고개가 아파서 머리도 지끈거릴 정도였지만 고개를 내릴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고 이틀이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법 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들의 작품들을 봤지만 시스니타소 성당 내부는 그것들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초월하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히 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벽과 천장을 깎아내리며 조각한 것이 아니라 2차원 평면 위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느낌을 아는가. 분명한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도 이런 표현과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기술 또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돋보적이고 위대한 천재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5. 베드로 대성당, 3미터 거인들이 생활했던 곳인가.
그런 시스티나소 성당의 천장화를 뒤로 하고, 몽롱한 기분에서 깨어나며 밖으로 나왔다. 내가 교황이었다면 하루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누워서 천장화만 바라보고 있고 싶은 공간이었다.
이런 <천장화>에 버금가는 것이 바로 베드로 대성당이라고 생각한다. 성당을 빠져나오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거대한 건물의 정면을 마주하게 된다. 예전에 만화로 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는 구름 위에 인간의 수십 배가 되는 거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만약 그런 세상이 있다면 내가 구름 위 신들의 세계에 올라가 신전을 마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게 하는 정면의 모습이었다.
내부의 화려한 장식이나 그런 것들을 일단 제외하고 규모로만 표현하자면, 내가 말 그대로 개미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혹은 키가 3~4미터 되는 거인들을 위해 지어진 듯한 건물이었다.
베드로 대성당 내부 내부에 9층 건물이 거뜬히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고 했다. 근데 정말 얼마나 큰지, 여태 내가 살아오며 눈으로 어떤 대상의 크기를 어림해 본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규모였다. 나는 이런 규모의 건물 혹은 공간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조차 없었다. 마치 에러에 걸린 듯.
이정도 규모면 귀신들린 사람도 금융치료 되겠다는 농담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도 한창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던 시절 비판을 피하기 위해 시각적으로 규모가 작아 보이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또 과거에는 10명이 성지순례를 떠나면 6명이 죽고 2명은 기어서, 2명만이 걸어서 이곳을 찾게 되는데 그렇게 고행을 겪은 사람들에게 과도한 위압감을 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편안한 느낌이 아니라 그 위용과 위세에 눌릴까 봐) 시각적으로 작아 보이는 설계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의 경험과 상상을 한참 뛰어넘는 규모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그 크기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이 성당 위의 마태복음 글자였는데, 그 글씨의 높이가 2m가 넘는다는 말이 도통 믿기지 않았다. 나중에 쿠폴라에 오르던 중 그곳에 들렸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크기는 이쯤 하고, 모든 곳은 빈틈없이 금으로 칠해져 있었다. 또 정교한 조각들(돌로 천을 조각했는데, 색이 칠해져 있었더라면 정말 얇은 천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생동감이 있는 조각들)은 곳곳에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 또 놀랐던 것들은, 위대한 그림들을 그대로 내부로 들여왔는데 유지력이 좋은 프레스코화가 아니라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돌조각들로 모자이크를 해서 높이가 4~5미터가 되는 크기로 확대해 그려놓았다. 글과 사진으로는 그 놀라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사실로만 받아들이기만 해야 한다.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베드로가 1대 교황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베드로가 죽었던 그 자리에서 그의 유골을 거둬 성당을 지은 곳이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앙 청동상 아래 숨겨진 공간에 베드로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손꼽아 기대한 곳이 아니었는데 말 그대로 충격을 받았던 시간이었다. 이런 건물을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작은 나라에서, 작은 세상에서 내가 지내고 있었는지 저절로 겸손해지게 되었다. 그곳에서 느낀 그 감동을 글이나 사진으로 다 담아내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다 표현할 수 있었다면 굳이 이곳을 찾을 이유도 없겠지.
살면서 꼭 한 번쯤은 방문해봐야 할 곳인 것 같다. 이렇게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음에 큰 감사가 된다. 내가 방문했지만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한 세 번쯤은 가서 봐야지 내가 그곳에 방문했음을 실감하고, 그 크기도 어느 정도 어림할 수 있을 것 같다.
6. 베드로 대성당 쿠폴라
올라갈 수 있으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올라서서 내려다봐야 한다. 이번 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나 큰 배드로 대성당 쿠폴라를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올라갔다. 올라서면 베드로 대성당 앞으로 열쇠 모양의 배드로 광장이 펼쳐진다. 아, 그전에 어찌나 높은지 올라가는 것도 한참 시간을 들여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갔는지 계단이 파여있을 정도였다. 쿠폴라에 가까워질수록 벽이 점점 기울어진다. 그 완벽한 대칭과 균형, 조화는 눈길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완벽한 계획도시를 바라보며 교황과 성경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해 보게 되면서도 수천 년 동안의 역사를 움직이게 했던 성경이 힘을 잃어가는 요즘 시대가 정말 특별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됐었다.
쿠폴라에서 내려다본 베드로 광장 그래도 사람은 뭘 좀 먹고살아야 하나보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기어이 허기가 옮기게 했다. 뒤늦게 허겁지겁 내려와 식당으로 향했다.
7. 성천사성, 판테온, 캄포 데 피오리, 트라스테베레
수 시간을 한 목소리에만 집중해야 하다 보니 생각보다 피곤했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성천사 성은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거대한 위용(어쩌면 베드로 대성당을 보고 난 직후였기 때문에 잘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독일에서 넘어와 바로 봤더라면 오늘 일기에 성천사성 이야기만 가득했을지도)은 아주 인상 깊었다. 판테온은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 사람들이 왜 그렇게 건물을 크게 짓고 싶어 했을까 싶은 의문이 자동으로 들게 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키가 한 3~4미터가 되는 거인들이 지은 듯 엄청나게 높고 넓었다. 날이 밝으면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기대했던 것에는 못 미치는 캄포 데 피오리와 트라스 테베레였지만 걸어가는 길 내내 분위기가 좋았다. 길거리에서 하는 여러 음악들과 사람들 그 분위기가 사랑스러웠다. 낭만이 넘치는 도시다.
어디를 가던 수 세기 전에 지어졌고,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화려한 내부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보로 여겨질만한 유산들이 거리 곳곳에 놓여져 있으니 자연스레 덤덤해지는 것 같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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