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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츠 카프카 | 민음사] 성, 줄거리와 서평
    서평 2022. 10. 24. 08:58


    0. 방황?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

    카프카의 문체는 독자를 방황시키는 매력이 있음을, 세 번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변신』에서 처음 카프카를 만났고, ​​​『심판』에서 모호하고도 심각한 방황에 빠져 수많은 비난의 마음을 가졌다. 여기서 방황이란 길을 잃어 목적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짐작하지 못하고 독서가 시간 낭비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을 통해서 '카프카의 문체적 방황'이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됨을 깨닫게 되었다. 즉, 카프카는 하나의 글에 수십개의 교훈·지혜·깨달음을 남겨두었고 무엇을 발견할지는 독자들이 마음먹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때 각 요소들은 밀접하게 상호 결부되어 있어 A처럼 해석되는가 싶다가도 B로 해석되는 성격을 지님으로서, 해석의 어려움(방황)을 가중시킨다.

     

     

    ​1. 일상의 구속, 자아성취의 한계

    그럼 나는 ​​『성』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하면, 한 개인이 인간사회에서 일상의 임무를 초월한 자아성취의 한계에 주목했다. 토지측량사 요제프 K는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높은 목표를 설정해 자신을 특별한 소명을 받은 존재로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로운 삶보다 성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고자 다른 대인들은 모두 수단쯤으로 여기고-프리다와의 사랑도 결국 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끝가지 성에 접근하고자 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거의 성에 접근할 듯하면서도 결국 일상의 임무-사랑, 생계, 인간관계-가 그를 성의 발치에서 일상으로 끌어낸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K의 처지에서 한 개인이 자이성취를 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가정·생계와 같은 일상의 임무로 회귀할 수 밖에 없는 오늘날 인간들의 비극적 운명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 해설에서는 "영위할 만한 인간적인 삶이란 성을 향한 욕망을 중단하고 대신 일상의 임무와 가족관계로 그 욕망을 돌리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일상을 초월한 자아성취를 애당초 불가능한 것으로 바라보는 해설을 전적으로 반대한다.

     

    소설에서는 끝내 K가 성에 접근하지 못했지만 미완성으로 끝냈다는 점에서 자아성취의 가능성(성에 대한 접근)을 열어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물론 카프카의 동료가 밝힌 바로는 끝내 K가 성에 접근하지 못하고 병들어 죽어가며 끝난다고 했다고 하지만). 

     

     

    2. 인정인가 조화인가

    두 번째로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높은 목표를 설정해 자신을 특별한 소명을 받은 존재로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로운 삶보다 성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K의 이러한 성격은 카프카 자신의 이야기라고도 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로서 초월한 그 무언가-종교적 의미 또는 직업적 목표-를 바라보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공동체에 흡수되지 않는 것이라 겉으로 드러내면 물과 기름처럼 나는 분리되는 것을 느끼고는 한다. 소명감을 버려야 함은 아니다. 소명감은 내가 배움을 추구하는 등 세상을 살아가는 주된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하버드 대학의 '성인 발달 연구'에서 밝혔듯 사람들과의 조화로운 삶 역시 인생에서 중요한 것임을 깨달을 필요를 느꼈다.

     

     

    3. 환상이 이데올로기가 될 때 발생하는 폭력

    세 번째로 주체가 갖는 환상이 이데올로기로 발전할 때 사회적인 폭력을 야기할 수 있음에 주목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성을 거의 신격화하여 막강한 권력이 있는 듯 묘사한다. 실제로 올가네 집안은 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가족 전제가 마을로부터 완전히 도태된 모습을 통해서 성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직접적인 성의 권력이 표출되는 장면은 없다. 모두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나 개인적인 견해로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어쩌면 성의 권력은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불투명한 성의 존재와 알려진 바가 하나도 없는 성의 미스터리함은 마을 사람들의 환상에 힘을 더한다. 원래부터 존재했던 성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씩 환상을 더해가다 보니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만들어진 그 ​ 이데올로기로부터 지배를 받는다.

     

    성은 입을 열지도 않았지만 알아서 사람들이 복종하기 시작하며, 성을 거역하면 본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처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주체가 갖는 환상이 이데올로기로 발전할 때 사회적인 폭력을 야기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이 집단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원초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점차 사상이 굳어가며 어느새 하나의 법이 되고, 결국 원초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범법한 자들로 여기며, 그들을 처벌하려는 나의 마음이 그들에게 폭력이 되어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4. 성과 종교의 연관성

    네 번째로 성과 K의 관계에서 인간으로서 종교에 대해 느끼는 성격을 미루어 볼 수 있었다.

     

    첫째로, 성과 신은 알려고 다가갈 수록 더욱 모호하게 느껴진 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K는 성의 존재를 분명히 느끼면서도 그곳을 막상 바라보았을 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이라고 표현했다. 나도 이와 같은 경험을 분명히 해 보았기에 이러한 현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차라리 무교였을 때·종교에 관심이 없었을 때가​ '신'에 대해 더 시원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었을 것 같다.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알려고 노력할수록, 접근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모호하게 다가왔던 것이다(물론 종교를 가지기 전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두 번째로, 일상적 임무가 '신'의 접근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앞서 '일상적 임무를 초월한 자아성취'의 이야기를 약간 변형시켜서 '자아성취'에 '신에 대한 이해'를 대입하게 된다면, 우리가 신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마다 (종교적 표현을 빌려서)사탄은 우리를 일상으로 끌어내어 방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세 번째로, '신'·'성'과 관련된 자들은 고귀하고 성스러울 것만 같던 환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지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K가 바르바나스를 처음 보았을 때에 그의 용모에 감탄하고, 따라가면 분명히 성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그는 K와 다를 바 없던 한 인간이자 훌륭해 보이던 용모는 밝은 곳에서 다시 보니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을 때에 단상 앞에 나와 말씀을 전하거나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신성하고 고귀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이해할수록 결국 나와 다른 것이 하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 K가 그랬듯 영원히 알아가야 할 존재는 성의 하인이나 관료들이 아닌 '성'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5. 과거 불투명한 관청 시스템 

    다섯 번째로 ​​성이 K의 접근을 일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낱같은 희망을 주는 듯하다가 모호한 대답만을 남기고 사라져 접근을 방해하는 것을 보면서. 이 책이 쓰일 때 즈음 정부의 관청 시스템이 오늘날처럼 접근이 쉽거나 투명하지 않아-인터넷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카프카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관료주의 체제에 대한 막연함과 답답함을 국민들이 실제로 많이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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