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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의 유럽여행] 런던에 녹아들기 | 뜻밖의 즐거움, 네셔널 갤러리
    일상 2023. 2. 28. 14:54
     
    0. 비 오는 날 찾은 내셔널 갤러리

    비가 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확 줄어든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찾아보다가 내셔널 갤러리를 가기로 마음먹고 움직였는데, 자연사 박물관이랑 헷갈렸다는 걸 도착해서야 알았다.

     

    공중에 매달린 흰 수염 고래 골격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컸는데 어차피 반쯤은 시간을 때우려고 왔기에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런던에서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어디선가 그림을 보는 법에 대해서 들었던 적이 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보면 정면에서만 보지 말고 네다섯 걸음 떨어져 보기도 하고, 아주 가까이에서 보기도 하고, 방향을 바꿔가며 사선에서 보기도 하고,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 대각선으로 시선을 훑어보기도 하며,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 보기도 하며 그림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다 이름조차 모르는 화가의 그림 앞에서 그림을 한참 뜯어봤다. 왔다 갔다 거리며 메모장에 느낀 것들을 옮겨 적었는데 그 과정 자체도 매우 재미있었을 뿐만 아니라, 뭔가 예술에 살짝 발을 담가본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덧붙여서, 앞으로 인공지능의 활용에 대한 내용을 다룬 책인 <에이트>에서 정기적으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활동, 대표적으로 예술 활동을 하라는 말을 했었음을 떠올리며 예술가의 정신을 공유하는 활동이 얼마나 유익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하루였던 것 같다.

    네셔널 갤러리 광장. 각종 사회 이슈를 다룬 사회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천과 털 각종 질감을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명암과 두께감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그림이 아니라 조각이 아니가 하는 그런 착각이 들게 할 정도다. 이런 화가들에게 피부 그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 같다. 화가를 만나면 그림을 그릴 때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어딘지 물어보고 싶다.

    또 자세히 살펴 보면 천이 접혀있던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다. 단지 미적인 부분만을 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과 타협한 흔적으로 읽힌다. 

     특징 중 하나는 배경이 암흑이라는 것. 덕분에 대상이 아주 돋보인다. 아울러 그림이 잘 읽히는 위치가 있다. 항상 정면이 정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시선을 따라서 왼쪽 사선에서 볼 때 입체감이 더 들고 생기가 돈다.

    하지만 절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시선을 쫓아가봐도 약간 사시인 듯 보이는 눈동자가 시선을 한 곳에 모으지 않고 흩어버림으로써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하기야 이런 그림이 집에 걸려 눈을 마주치려 했으면 무서울 법도 하다

     

    아름답다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다. 정교하거나 입체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붓 터치가 눈에 다 읽히고 채워지지 않은 배경 즉 캔버스가 군데군데 그대로 보이기도 한다.

    손은 뭉개져 구분하기 어렵고, 나무는 어디서부터 하나의 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모자인지 주머니인지 가늠할 수 없다. 

    뭉개져버린 배경 위로 경계선이 또렷하게 그어져 사람이 서있다. 그런 배경 덕분에 인물이 더 돋보인다.

     

    복숭앗빛 볼과 새침한 입술은 물리적인 생기는 없지만 산뜻한 느낌을 주어 매력적이다. 자신감 넘치는 자세와 힘 있게 뻗은 다리를 통해 어디든지 달려 나갈 수 있을듯한 단단한 에너지가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자세히 살펴보면 테두리가 뭉개지며 명암을 표현했다. 카라와 왼쪽 겨드랑이를 보면 옷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테두리인 듯 멀리서 보면 그림자로 쓰였다.

    뭉개되 디테일은 놓치지 않은 그림이다. 마치 피카소처럼 붓 터치는 최소화하되 중요한 것들은 놓치지 않았다. 아주 매력적인 그림이다. 내가 갖는다면 가장 넓은 방, 거실에 걸어두고 싶다.

     

    구도가 독특하다. 그림 안에서만 보면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사실 거울을 통해 그림 너머의 나에게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거울 안의 반사된 형상은 뭉개져서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눈이 마주쳤다면 되려 불편했을 수도 있다. 내가 등 뒤로 훔쳐보고 있던 상황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니까. 아름다운 뒤태를 담은 그림은 많지만 그녀의 허락을 받은 그림은 처음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신성스럽게 그린 그림이다. 마치 하나의 전구인 듯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빛이 뻗어나가는데 빛의 온도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림은 정말 잘 찍은 사진과도 같다. 사진은 셔터 한번 누르면 되지만 그림은 시작하면 적어도 몇 시간은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화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구도를 배경으로 잡기 때문이다. 사진과는 달리 몇 배의 신중함이 든다.

     

    아울러 본인이 느끼기에 가장 미에 가까운 색을 쓴다. 단순한 아름다움만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을 가장 잘 표현하는 색을 신중하게 고른다. 때문에 사진에는 시점(時點)이 있지만 그림에는 없다.

    그래서 풍경화를 잘 살펴보면 풍경 구도를 어깨너머로 배워볼 수 있다.

     


    1. 세 번째 찾은 쇼디치

    후에 바로 쇼디치로 향하는 버스편이 있어서 쇼디치로 갔다. 지하철이 확실히 빠르지만 그보다 버스의 2층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주는 재미가 훨씬 크기 때문에 굳이 버스를 탔다.

     

    쇼디치를 무려 세 번째 찾았는데 이번 여행에서 같은 장소를 세 번 찾은 것은 미켈란젤로 언덕뿐이었다. 거긴 워낙에 기대를 많이 했던 곳이기에 이해가 가지만 이곳은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되었는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보지 못했던 가게들이 많이 오픈되어 있었다.

     

    주말에 활성화가 더 잘 된다기에 찾았는데 확실히 지난번에는 느끼지 못했던, 내 안에 없던 예술 세포들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도 세련되었고, 더 많은 빈티지 샵들이 열려있었다. 들어가보니 옷들도 개성 있고 무엇보다 방문한 사람들의 패션이 한 명 한 명 눈길을 끌었다.

     

    맘에 드는 빈티지 폴로 셔츠를 찾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남색 조끼와 같이 입으면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봤더니 6만 원이 훌쩍 넘었다. 누가 입던 거라 3만 원이 넘어도 고민하겠건만 고맙게도 6만 원대라 미련 없이 자리에 두고 나왔다.

     

    또 먹거리들도 많이 들어섰는데 그보다 그것들을 먹을 수 있도록 해 둔 공간이 기억에 남는다. 요즈음 유행하는 '백 룸'을 떠올리게 하는 넓은 주차장같은 공간에 다인용 테이블들이 드문드문, 아주 넓은 공간을 두고 놓여 있었다. 사실 여기에서 확실히 세련된 감성이 있는 곳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 한국에서는 뭔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여기서는 본능에 이끌린 마치 진화하듯 나타난 디자인계의 변화처럼 느껴졌다.

     

     

    2. 노팅힐은 이른 시간에 가세요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나가려고 했지만 또다시 몸이 무거워져서 드러누웠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주말맞이 노팅힐을 찾았는데(주말에 활성화가 된다고) 이미 늦은지라 매장이 전부 문을 닫고 있었다. 내일 다시 올까 생각도 해봤지만 금요일과 토요일이 활성화되는 날이라기에 무척 아쉬웠다. 그래도 지난번에 금요일에 왔으니 볼 건 다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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